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리 안드로포프 (문단 편집) === 서기장 취임 전 === 1914년 6월 15일 [[러시아 제국]] 스타브로폴 고베르노라테에서 태어났으며, 페트로자보스크 국립 대학 및 공산당 간부 학교를 졸업한 뒤 [[1939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고 [[겨울전쟁]] 이후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콤소몰]]을 감독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해당 SSR 중앙위원회의 제1서기로 선출되었다. 다른 전임 서기장들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정치국원이나 못해도 정치인([[정치장교]])으로서 한 자리 꿰차고 있었지만, 하지만 안드로포프는 역대 소련 서기장 중 유일무이하게 정치인이 아닌 '''[[빨치산#s-4.2|파르티잔]]'''으로서 [[나치 독일]], [[핀란드군]]과 싸운 인물이며, 이 시기부터 조금씩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다만,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 기간에 일시적으로 [[숙청]]되어 노역 생활을 하다가 복권된 [[흑역사]]도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F0417-0001-028%2C_Berlin%2C_VII._SED-Parteitag%2C_1.Tag.jpg]] 1967년, KGB 의장 시절의 안드로포프(맨 왼쪽). 오른쪽의 인물은 순서대로 동독의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 소련의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이다. 2차대전 후 외교 분야와 첩보 부문의 실력자로 떠오른 안드로포프는 1953년~1957년에 [[헝가리 인민공화국|헝가리]] 주재 대사관의 참사관과 대사를 연속으로 재임했는데, 여느 소련 대사들과 달리 헝가리 곳곳을 여행하면서 헝가리의 일반 농민, 노동자, 지식인들과 광범위한 접촉을 가졌다.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헝가리 대사를 지내면서 [[소련군]]의 유혈진압에 결정적으로 관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1960년대, 헝가리의 부분적 [[자본주의]] 경제체제 도입을 묵인 내지는 지원해 헝가리 경제 부흥에 일조하기도 했다.[[https://www.joongang.co.kr/amparticle/1663681|#]] 소련의 유엔 대표부 차석대사를 역임했던 빅토르 이스라옐란은 그가 소련 외교 아카데미에 있던 시절에 강연을 하러 온 헝가리 대사 시절의 안드로포프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유창한 헝가리어 실력과 헝가리 역사와 문학에 대한 대단히 깊은 조예를 보였고 강연이 대성공으로 끝났다고 한다. 강연이 끝난 후 이스라옐란은 안드로포프에게 헝가리 '반혁명난동' 때 '미제국주의'의 개입 여부에 대해서 그에게 질문했는데 안드로포프는 껄껄 웃으면서 그딴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미국인들이 오히려 소련 대사관에 와서 정보를 구걸했다고 소련 공식 입장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발언을 해서 깜짝 놀랐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임레 너지가 미제국주의의 간첩이라고 보고한 것이 다름아닌 안드로포프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누구보다도 사실 관계 파악에 능하지만 정치적 필요에 맞지 않으면 가차없이 묵살할 수 있는 무서운 인물이라고 그를 평가했다. 귀국 후 1957년 3월 당중앙위원회 연락부장에 임명, 1967년까지 10년간 재임하였으며, 1961년 10월, 22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11월 전원회의에서 서기국 서기로도 선거되었다. 1967년 5월 시점에서 [[국가보안위원회]](KGB) 주석은 브레즈네프와 함께 흐루쇼프 축출에 동참했던 [[블라디미르 세미차스트니]]였다. 그는 역시 KGB 주석을 역임했던 브레즈네프의 반대파 셸레핀의 측근이었는데, 브레즈네프는 셸레핀이 와병한 틈을 타서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고 세미차스트니를 방청으로 참석시켰다. 그리고 KGB를 당중앙위원회에 더욱 밀착시키기 위해서 서기국 서기가 새로운 KGB 주석에 임명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측근인 안드로포프를 전격적으로 신임 주석에 임명하고 세미차스트니를 숙청하였다. 충격을 받은 세미차스트니는 "더 밀착을 시킨다니 무슨 소립니까? 그렇다면 제가 언제 당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저는 당중앙위원회 위원입니다. 제발 동지들..."이라고 정치국 위원들에게 애원했지만 브레즈네프는 "논의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라고 묵살하고 그를 경질해버렸다. 그리고 1967년 5월, 안드로포프는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진하였으며 KGB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서기국에서는 물러났다. 1973년 4월 전원회의에서는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여 상장 계급을 받았으며, 1976년에는 대장 계급을 받았다. 안드로포프는 소비에트 연방의 KGB 주석을 재임하면서 서구사상의 유입을 경계하여 매우 엄격한 검열 및 탄압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론(異論)의 탄압, [[반공]] [[작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추방, [[핵]] [[물리학자]]이자 반체제 인권활동가인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의 연금 등이 안드로포프의 재임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1970년, '''[[괴벨스]]의 아내 마그다 괴벨스의 무덤'''이 [[네오 나치]]들의 성지로 전락할 것을 우려해 마그다 괴벨스와 6명의 자녀들의 유해를 다시 꺼내 불살라 버린 후 [[엘베 강]]에 뿌려버리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안드로포프가 KGB 주석으로 재임했을 때에는 스탈린 시절 처럼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굴라그]]로 보내는 일은 줄어들었지만, 대신 반체제 인사들에게 일부러 정신병자라는 딱지를 붙인 뒤 [[정신병원]]에 가둬버리는 일을 하기도 했고 컨테이너에 감금시켜버리기도 했다. 육체에 해를 가하는 혹독한 고문은 거의 없었지만 대신 반체제 인사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는 정신적 고문 행위나 다를 바 없었다. 종교에 대한 탄압도 강경하게 시행한 것은 물론이고 [[동성애]]에 대해서도 증거를 조작하면서까지 강경하게 탄압하며[* 심지어 증인들이 피의자에 대한 증언을 꺼릴 경우 '''그 증인까지 형사고발 당할 수 있었다.'''] 서구 사상의 유입을 철저히 차단하고자 했다. 안드로포프가 소비에트 연방의 KGB 주석을 지내던 시절 [[서독]] [[뮌헨]]에서 열린 [[1972 뮌헨 올림픽]] 도중에 [[검은 9월단]]이 일으킨 [[뮌헨 올림픽 참사]]가 터지자, '저런 상황이 소련에서 터지면 [[스페츠나츠]]만 믿어선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안드로포프는 KGB 내에 자체적인 무력조직 겸 [[대테러부대]]인 국내용 '[[알파 그룹]]'과 국외용 '빔펠 그룹(베타 그룹)'을 창설하였다. [[대테러부대]] 창설에 별 관심이 없던 당시 소련 지도층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파격적인 결정을 한 셈이다. 재미있게도 이 두 대테러부대는 창설자가 나중에 서기장이 되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서기장에게 유달리 충성심이 강했는데, 훗날 소련 공산당의 보수파가 고르바초프를 축출하기 위해서 [[8월 쿠데타|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블라디미르 크류츠코프 당시 KGB 주석(정변의 찬동자)이 이들 부대에게 [[https://en.wikipedia.org/wiki/White_House_(Moscow)|러시아 소비에트 최고회의 의사당]]을 점령하라고 지시했으나, 그 명령을 거부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서구사상의 유입을 막고 반대파를 처단한 안드로포프였지만, 소비에트 연방의 KGB 주석으로 재직하면서 오히려 브레즈네프 시기를 소련의 '''위기'''라고 생각하였으며, 소련의 체제를 '''개혁하기로''' 굳게 결심하게 된다. 원래 브레즈네프의 후임 서기장으로 내정된 사람은 그의 최측근 겸 조력자였던 수완가 미하일 수슬로프[* 수슬로프는 확고한 공산주의자였으나 온건노선을 지향했고 안드로포프와 고르바초프를 도왔다. 고르바초프는 그를 원칙주의자지만 수구주의자는 아니였고, 욕심이 없으며 당내 대립과 다툼을 중화시킨 인물이라 평가했고 동시에 자신의 강력한 후원자였다고 언급했다. (고르바초프 자서전 <선택>)]였지만, 1982년 1월 그가 [[https://news.joins.com/article/1615007|사망]]해버리자 후계자 자리는 공백이 되었고 결국 궁정 암투로 이어진다. 그 결과 후임 서기장으로 지목받은 사람은 사실 안드로포프가 아닌 체르넨코였지만, 체르넨코가 소련의 당정 관료조직의 지지에만 집중하던 것과 달리 안드로포프는 KGB와 군대의 신뢰를 받고 있었고, 국방장관 [[드미트리 우스티노프]]가 체르넨코에게 "나와 군대는 안드로포프를 지지한다"라고 대놓고 말하자 체르넨코도 단념했다. 결국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가 사망하자 체르넨코는 당 내 단합을 위한 형식으로 안드로포프를 서기장직에 추천했고 안드로포프는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만장일치 지지를 받아 소련 역사상 최초로 최고지도자 사후 별다른 잡음 없이 순조롭게 서기장직을 계승한 사람이 된다. 1983년 6월에는 체르넨코의 추천으로 최고회의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아 소련 헌법상의 국가원수인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에 선출되었다. [youtube(Ozs4-GNrNnk)] 브레즈네프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낭독하고 있는 안드로포프. 목소리를 잘 들어보면 이미 건강이 썩 좋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youtube(Zqr7iILG6Q0)] 3분 38초부터 낭독하는 안드로포프. 좀 더 앞을 보면 브레즈네프와 키스[* 이는 브레즈네프가 정치적 의도로 키스를 많이 하였기 때문이며, 21세기에도 유명하다.]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